제 6과 나(인간)는 누구인가?
19세기의 염세적인 철학자였던 쇼펜하우어가 어느 날 프랑크푸르트 공원 벤치에 앉아 있을 때였다. 공원관리인이 초라한 행색에 헝클어진 머리를 한 그를 노숙자로 오해하고 퉁명스럽게 물었다고 한다. “당신 누구요?” 그러자 그 철학자는 씁쓸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도 그걸 알았으면 좋겠소.”
도대체 사람은 무엇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이 질문은 매우 오랜 된 질문이며 그만큼 중요한 질문이다. 우리는 인간됨의 진정한 의미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여기에 두 가지 극단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속적 인본주의자들로 그들은 인간이 맹목적 진화의 산물일 뿐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 안에 있는 향후 진화 잠재력에 대해 무한히 확신하며 특히 언젠가는 인간 자신이 역사를 다스리고 자신의 운명을 통제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 입장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원죄’라고 부르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원죄란 우리 본성안에 있는 자기 중심성의 왜곡이며 이것 때문에 많은 사회개혁가들의 꿈이 좌절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인데 이들은 비관주의 내지 절망으로 나아갑니다. 비록 우리가 어떻게든 존재할 수 있는 용기는 내야겠지만 하나님이 없기에 아무것도 의미없으며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부조리하고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성에 대해서 위의 두 가지 극단을 피하면서 인간성의 근본적 실존을 정확하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성경은 인간성의 영광과 수치, 위엄과 부패라는 역설적인 사실을 말해줍니다.
1. 영광
성경의 첫 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있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습니다만 간단히 정리하자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성경에서 보여지는 바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에게만 국한된 특성들의 총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인간에게는 이성적 사고능력이 있습니다.
둘째 인간에게는 도덕적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 즉 선악을 구별할 수 있는 양심이 있습니다
셋째 인간에게는 예술적인 창조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는데 하나님 자신처럼 우리를 창조적인 피조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와 노래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만들며, 꿈을 꾸며 춤을 춥니다.
넷째 인간에게는 사회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사랑을 매개로 하는 진정한 관계를 의미하며 그것을 갈망합니다.
다섯째 인간에게는 겸손하게 예배드릴 능력이 있습니다. 물질주의는 공산주의의 형태로든 자본주의의 형태로든 인간의 영혼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왜냐면 인간은 하나님이 영적인 존재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물질적 질서를 초월하는 실체가 있음을 알며, 사람들은 곳곳에서 그 실체를 추구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은 무한히 위대한 자 앞에 절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성경은 인간은 떡으로만 살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라고 말씀하며(마4:4) 하나님을 예배(요4:24)할 때 가장 참된 인간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2. 수치
그러나 인간의 이런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영광스러운 면은 인간의 범죄와 타락이후에 너무나 큰 문제에 봉착하고 말았습니다. 창세기 3장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께 범죄하여 타락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죽음과 저주와 고통이 시작되었는지를 말해줍니다. 그리고 인간의 영광스러운 면은 수치스러움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다음의 말씀속에서 잘 나타납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7:21-23)
이처럼 예수님은 인간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선하다고 가르치시지 않고 반대로 인간이 악을 행하는 능력을 타고 났다고 가르치십니다. 이러한 말씀은 일찍이 솔로몬왕이 한 말을 기억하게 합니다.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 돌아가는 것이라”(전9:3)
아무튼 예수님의 말씀속에서 우리는 인간 악의 네가지 측면을 살피게 됩니다.
첫째 악의 범위는 일부 나쁜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전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둘째 악의 핵심은 자기 중심성입니다.
셋째 악의 근원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을 강조하셨는데 예수님이 마음이라고 부른 것은 마치 깊은 우물과 같은데 평상시에는 우물 바닥에 깔린 두터운 진흙 퇴적물은 보이지도 감지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격한 감정이라는 바람이 물을 휘저으면 가장 흉측하고 악취가 나오는 오물이 깊은 곳에서 올라와 표면으로 드러납니다.
넷째 악의 결과는 그것이 우리를 더럽힌다는 것입니다. 즉 악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운 존재가 되고 하나님을 만나기에 부적합한 존재가 됩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사59:2-3)
3. 역설
인간은 가장 고상하고 고결할 수 있는 동시에 가장 천박하고 잔인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자답게 하나님처럼 행동할 수 가 있는가 하면 동시에 인간과는 전혀 구별된 짐승처럼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하고 선택하고 창조하고 사랑하고 예배할 수 있지만 또한 동시에 미워하고 탐내고 싸우고 살인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아픈자를 돌보기 위해 병원을 고안하고, 지혜를 얻기 위해 대학을 설립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교회를 세운 존재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고문실과 포로 수용소와 핵 무기와 대량 살상용 무기를 발명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성의 역설입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것에서 기인하는 모든 것은 기꺼이 긍정하고, 범죄와 타락에서 기인하는 모든 것은 단호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때에 어떤 태도가 적합한지를 구분하는 분별력을 가져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통해서 날마다 배워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내 안에 더러움을 씻어 깨끗하게 해야 하고 새로운 꿈과 열망으로 채워진 새로운 마음이 필요합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보혈은 날마다 우리를 정켤케 하며,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은 날마다 우리를 성화시키시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위로와 소망을 부여하는지 모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4. 그리스도의 보혈로 회복된 자유자의 은총과 사명
예수 그리스도는 잃어버린 우리 인간의 영광을 회복하고 죽음과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인생들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다음의 구절들에서 잘 나타납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2:15)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1-32)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8:34,36)
이제 누구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진정으로 부르면 그 안에서, 그 보혈의 능력안에서 참 자유와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은총안에서 두 가지 사명을 부여 받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사명(마22:37-40, 요13:34-35)과 복음전파의 사명(마28:18-20, 행1:8)입니다. 그리고 이 사명을 수행함으로 인생은 삶의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요15:4-8)을 살 수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