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도 솔라랜턴, 전기사역의 시작!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올해의 전기사역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약 3개월에 걸쳐서 배를 타고 온 솔라랜턴(“솔라램프” 혹은 “태양광손전등”)이 컨테이너 안에서 고스란히 잠자다 저희에게로 도착이 된 것입니다. 매년 전도팀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 많은 수량의 솔라랜턴은 이제 다시 신기다의 다른 지역(일부는 아루샤와 카라투 지역 포함)의 가난한 가정과 교회들을 빛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2010년부터 꾸준히 진행하여 온 솔라랜턴, 전기사역은 일일이 나열할 수 없지만 특별히 한국의 들꽃교회와 캐나다의 교회 및 후원동역자분들을 중심으로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캐나다안에서도 여러지역의 감동과 후원의 결단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지만 여전히 아프리카에 왜 전기가 필요한 지를 이상하리 만큼 모르고 있는 현실이 더더욱 안타까와 해야 하기도 했습니다(사실, 사탄이 어떻게 다스려 노았는지 현지인들도 물은 없으면 아니되지만 전기는 안 사용하여도 살아가는데 큰 불편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2014년도에는 특별히 신기다 지역의 교회들을 중심으로 사역을 전개해 나갈 예정입니다. 온 솔라 물품들과 또 사역을 함께 할 동역자분들을 동승시켜 며칠간을 고려한다면 여러가지 준비가 필요한데, 아직 개인차량이 변변치 않아 넉넉한(큰) 차량이 구해지면 조만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답니다.
신기다라는 지역은 현재 저희 YWAM 베이스를 통하여 새롭게 활발히 구축되고 있는 가운데에 있을뿐더러 탄자니아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어서 탄자니아 전역을 향한 기대가 충만한 상황에 접해 있습니다. 비록 인도양 동부의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밀고 들어 오는 무슬림세력에 대한 보이지 않는 영적싸움을 하고 있음에도 예수님의 권세의 회복을 전적으로 믿고 중심에서부터 나아 가고 싶은 것이지요.
벌써 오랫동안 지역사회와 교회들과의 연합으로 인한 교제의 끈은 이제 신뢰함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환영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번에 솔라랜턴을 집중적으로 교회들을 찾아 방문하고 나누는 것은 이러한 신뢰를 더욱 충만하게 함이요, 대부분 전기를 사용하지 못함으로 인한 평일의 저녁예배를 지원하기 위함입니다. 설사 소형발전기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비싼 석유를 사용하여야 하기 때문에 교회들은 적지 않은 부담을 가지고 있으며 가난한 교회는 상대적으로 값비싼 호롱불이 고작인 형편입니다 .
사실 현지인들은 한국의 과거도 그랬지만 안경을 쓴 어린이나 어른들이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평성을 보는 것이기도 한데 그래서 좁은 공간이라면 작은 불빛이라도 별 불편함이 없는 복된 시력들을 갖고 있습니다. 집에서나 교회에서나 그리고 어디에서나 작은 불빛에 익숙해져 있는 현지인들은 오직 하늘만, 예수님의 은혜만 기다리고 있을뿐입니다. 돈이 없으면 그저 달빛을 위로삼아 좀 더 밝은 바깥을 거닐기도 하고 미처 못다한 일이 있으면 허드렛 일을 마무리하기도 하는 모습은 마치 구약성서에 있는 히브리백성의 어느 단면(굳이 표현하자면, 하나님과의 첫사랑을 잘 간직하지 못하여 믿음의 변화가 적은, 하지만 바리새인처럼 교만하지는 않은 상태…)을 그대로 보이고 있어 자연스레 예수님의 참빛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연상시키고 적용하게 만듭니다.
그러고 보면, 성경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빛에서 시작하여 빛(새하늘, 새땅, 참광명!)으로 끝이 납니다. 아프리카는 유난히 어두움에 익숙해져 있어 빛을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가난한 현지인들은 달빛보다 밝은 빛을 기대하지도 않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또한 우스개 표현이지만, 솔라랜턴을 배부하는 문명인으로서 느끼는 것은, 전기사역을 수행하면서 빛을 전하는 사람은 대개는 안경을 쓰고 전하지만 정작 빛을 받는 현지인들은 안경을 쓰지 않은 묘한 세상문명의 딜레마(불완전함)를 떠오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아프리카가 그렇고 탄자니아가 그렇지만 대부분의 가난한 현지인들은 여전히 어떤 변화의 기미가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들의 오랜 조상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무리 최소한의 결단이나 개혁이라고 하더라도 누군가의 대가(원조) 없이 스스로는 절대로 행하지를 않습니다. 무엇이 어두움의 근본인지를 전혀 알아채리지 못하고 있기에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선교사로서 그 세대의 끈을 바라보게 합니다. 도대체 왜 이리도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으며 도대체 누구부터 이 악순환의 끈을 끊어 내야 할까요?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대상은 어린자녀들 이었습니다. 앞으로 가능할 지 아니면 불가능할 지 모르는 일이지만 다만 처름 시작된 감동이 예언이 되기를 기대하고픈 마음뿐입니다. 어린 자녀들이야 말로 순수한 미래를 가지고 있으며 예수님이 그토록 곁에 두고 싶어하였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의 공부(배움)에 대한 생각이 솔라랜턴을 생각하든 가, 아니면 솔라랜턴 때문에 어린 자녀들이 공부를 생각하든 지 간에, 어떤 기대하는 변화가 일어나기를 소망하며 전기사역에 임하고 있습니다. 가정을 방문하면, 항상 공부방에 대한 이야기를 터무니없어도 그 부모와 이야기를 당부하고 설사 교회를 방문하더라도 학생들과의 성경공부를 이야기하곤 합니다.
아프리카 대륙을 제외하곤 어느 대륙을 보더라도 어느 시점에 문명을 일으키지 못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문명의 발상지라고 하는 아프리카만 유독 상대적인 문명이 일어나지를 않았다는 것은 성경이외에는 달리 그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고 어두움에 방황해야 할 우리에게 참빛으로 다가 오신 예수님께서 정녕 그 해답을 알고 계실 것이고 성령님 역시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우리와 그들 곁에서 기다리고 계실 줄 믿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을 사랑하셨다면 그것은 미래에 대한 소망일 것이겠고 또한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자녀이기에 암시적으로는 우리 모두를 그 소망가운데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이겠죠.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분의 때는 정확할 것입니다. 반드시 말세에 필요한 그 참빛을, 소망하는 모든 영혼(특별히 어린영혼!)에게 안겨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