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
종교개혁자 시리즈-존 칼빈 2017년 11월 22일
1 출생과 성장
종교개혁의 주된 지도자는 독일의 루터(1483-1546) 그리고 스위스의 쯔빙글리(1484-1531), 그리고 이후에 비록 프랑스 출신이나 스위스에서 주로 활동한 칼빈(1509-1564)입니다 그중 칼빈은 1509년에 프랑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쯔빙글리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교육열이 뛰어난 아버지의 영향으로 처음에 성직자가 되기 위해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다음에는 법률가로 그리고는 다시 인문주의 학자로서 최상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는 어릴때부터 천재소리를 들었다고 하는데 10대 시절부터 이미 헬라어 라틴어로 원서를 자유롭게 읽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17세가 되었을 때 칼빈은 교구의 신부와 다툰 일이 있었습니다 그 뒤 그의 아버지는 칼빈을 법률 학교로 옮기게 했습니다 나면서부터 백과사전적인 두뇌를 가진 칼빈은 도서관에 파묻혀 지내게 되는 데 법학 교수들이 휴강하게 될 때면 칼빈에게 대리 강의를 부탁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3년 후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칼빈은 인문주의 학자가 되어 평생을 보내기로 작정하고 공부를 하기 시작 곧 그 분야에서도 인정받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자신과 사상이 같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고관들에게까지 알려진 그는 이미 20대 초반에 저명인사가 되어 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2 그의 회심과 <기독교 강요> 저술
그의 회심과 거듭남에 대해서 학자마다 표현의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이는 1533년경 즉 24세쯤에 회심을 했다고 말하고 있고 어떤 이는 19세부터 26세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지 간에 그의 표현에 의하면 “한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소경이었으나 지금은 보게 된 그것이다”라는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그는 자신의 그때까지의 삶이 오로지 잘 먹고 잘 사는 일을 위해서라고 고백하고 교황 제도의 미신 속에서 굳어질 대로 굳어진 자신을 하나님께서 변화시키셨음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돌발적인 회심을 통하여 나를 굴복시키시고 배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만드셨습니다 참된 경건에 대해 약간의 지식을 맛 본 다음, 나는 그 안에서 자라고자 하는 욕망으로 불타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다른 공부를 전폐한 것은 아니었으나 주로 개신교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이대로 가면 자신은 유명한 사람이 되고 상류층으로서 편안하게 살 수 있었지만 그것은 자신의 영혼에 아무 의미가 없으며 이제는 다만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당시로서는 위험한 사상인 개신교의 신앙을 따르게 됩니다
“나는 내가 얼마나 부정하고 더러운 존재인가를 보았습니다 내가 빠져 있는 이 비참한 상태를 볼 때 두렵고 떨리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영원한 죽음에 대한 공포였습니다 나는 한시도 더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한없이 통곡하며 나의 과거를 미워하면서 나는 떠납니다”
비교적 개신교에 대해 포용적이던 프랑스가 1535년부터 박해를 시작하자 칼빈은 핍박을 피해 친구들 신세를 지며 방랑의 시간을 보내다가 스위스 바젤로 피난을 갑니다 그곳의 한 친구 집에는 굉장한 도서관이 있었습니다 그는 거기에서 교부들의 글을 여러날 동안 공부하였습니다 제롬이나 크리소스톰은 물론이고 어거스틴의 글을 읽고 크게 감화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는 개신교 조직신학에 관한 저서인 <기독교 강요>의 첫판을 씁니다. 이때가 1536년 3월이었는데 그 책은 총 6장으로 라틴어로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불과 27세의 나이에 그는 유럽에서 개신교의 지도자로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3 제네바에서의 개혁
그는 스트라스부르그에서 편안히 살고자 그곳으로 향하였지만 전쟁으로 인해 길이 막혀서 먼 길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리하여 그는 어쩔수 없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하루를 묵게 됩니다 당시 제네바는 정치난민, 용병, 빈민, 창녀가 가득했고 사람들은 거칠어서 툭하면 폭동과 유혈극이 일어나고 치안은 엉망이고 전 유럽에서 가장 심한 악취와 범죄가 들끓던 구제 불능의 도시였습니다 이때 이 소식은 어느새 그곳 목사인 윌리엄 파렐의 귀에 들어갔고 그는 칼빈을 찾아와 이 도시에서의 개혁 사업을 도와 달라고 간청하게 됩니다
그렇게 시작한 제네바에서의 사역에 칼빈은 제네바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도시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엄격한 도덕적 청사진, 신앙고백과 신앙지침서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술수가 동원되었고 또 시민들의 반발을 사서 칼빈과 파렐은 1538년 4월에 추방됩니다 이에 칼빈은 그길로 스트라스부르그로 가서 그곳에서 프랑스에서 온 이민자들을 위한 목회를 3년간 합니다
칼빈이 떠난 후 제네바는 폭동과 난동으로 더욱 엉망이 되어 버렸고 사람들 중에는 칼빈 시절의 건전하고 질서 정연한 사회를 그리워하면서 그를 다시 데려오려는 열망이 강하게 일어났고 칼빈을 설득합니다
이렇게 해서 1541년 다시 돌아온 칼빈은 제네바 교회를 새롭게 조직하였는데 12명의 평신도 장로들과 목사들이 당회를 구성하였고 그 당회는 교회 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의 도덕적 감독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예배 출석을 안하거나 음주, 가무, 도박, 춤추는 것 등 까지 당회에서 징계를 했다고 합니다 이런 칼빈이 세원 당회의 엄격한 법규에 물론 끊임없는 일부의 반발로 인한 난투극과 폭동 속에서 칼빈은 여러 번 위험을 당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망이 없어 보이던 제네바는 변해가기 시작합니다 난동은 점점 줄어들었고 음란한 댄스파티도 없어져 갔습니다 주일에는 새벽에 예배를 시작해 해 뜰 무렵 설교가 시작됩니다 점심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요리 문답, 오후 3시에는 다시 설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청중은 대부분 제네바 시민들이었으나 영국, 스코틀랜드,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신앙을 위해서 재산과 명예를 버리고 온 피난민들도 다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중에 많은 사람이 돌아가서 고국을 복음화 하는 데 헌신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청교도, 장로교, 개혁교회, 침례교 신자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4 칼빈의 신학
루터 신학의 핵심은 로마서 1장 17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을 근거로 한 “이신칭의” 신학입니다
반면 칼빈은 마태복음 6장 10절-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을 근거로 한 하나님의 절대주권 신학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것도 있지만 하나님의 주권은 전 우주를 다스리시는 것으로 세상의 모든 영역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칼빈은 모든 악과 선까지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루터와 쯔빙글리의 신학을 보완 발전시킨 것이 칼빈인데 그가 특히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이 바로 성화론, 즉 구원받은 자는 어떻게 거룩하게 살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카톨릭은 구원받는 수단으로서 선행을 강조하지만 칼빈은 구원받은 사람의 열매로써 선행을 하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적극적인 실천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반드시 그에 맞는 행위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거룩함을 추구하려 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칼빈은 교회를 통한 사회 참여 및 사회 개혁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통치가 사회 전반, 세상 모든 영역에 동일하게 적용되기를 바랐던 그는 제네바를 통해서 그것을 실험해 나갑니다
칼빈은 인간은 누구도 절대 권력을 가져서 안되고 주장해서도 안된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순종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칼빈의 논리로 영국과 미국에서 절대 군주에 대항할 수 있는 권리가 주장되었고 그리고 민중에 의해 선출된 대표자가 다스리는 국가 정치 시스템이 수립됩니다 또한 칼빈은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모든 권력을 독점하면 안된다고 보고 구약에 왕, 선지자, 제사장으로 분립되었듯이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의 삼권 분립체제를 제안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칼빈은 서구 민주주의의 아버지로 불리게 됩니다
칼빈은 또한 모든 세상의 (건전한) 직업이 거룩한 것이라고 가르치면서 주일날 교회 나와서 예배 드리는 것만 거룩한 것이 아니라 평일에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것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고 강조하면서 구원받은 백성은 쾌락과 게으름을 피하고 말씀과 기도로 무장해서 직업을 통해 세상에 들어가 세상을 깨끗하게 정화하는 것이 교회의 책임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돈을 많이 벌었을 때는 조심해야 한다고 인간의 욕심과 사치와 자기과시와 부의 과시는 엄격히 경계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성실과 저축으로 창출된 부는 더 많은 이익을 재생산해서 투자하거나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데 써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특별히 칼빈은 제네바 남성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 집중하기도 했습니다 왜냐면 당시의 제네바 남성들은 부도덕함, 술과 도박의 중독 등의 많은 문제로 가정에 소홀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그들을 가르쳐 구원받은 사람은 가정에 충실하고 열심히 일하며 십일조 하고 저축도 잘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칼빈의 가르침은 제네바 나아가서 스위스가 세계적 부국이 되고, 또 금융 중심지가 된 배경이기도 합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베버는 그의 저서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서구의 번영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시작하였으며 그 뿌리는 칼빈의 가르침 때문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교육개혁에 힘썼는데 1536년 제네바의 모든 시민의 자녀들에 대한 의무적인 학교 교육을 시행합니다 이때 여자아이들에게도 평등한 교육이 시행되는데 유럽에서 문맹을 처음으로 타파한 나라가 종교개혁 국가인 스위스와 독일과 영국입니다 일부 소수만을 위한 교육에서 소위 말하는 모든 이를 위한 공교육으로의 혁명적인 전환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와 아울러 1559년 칼빈은 제네바에 제네바 아카데미를 청설합니다 당시 전 유럽에서 일어난 종교전쟁으로 인한 핍박을 피해 많은 이들이 제네바로 망명을 왔습니다 이들 중 수많은 인재들이 제네바 아카데미에 와서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4-5년씩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기초한 칼빈의 신학을 공부하고 일반 학문들을 공부했습니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조국으로 돌아가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고 칼빈에게 배운 성경적인 개혁정신을 실천합니다 그중 대표적인 이가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1514-1572)입니다. 그는 칼빈의 수제자로서 제네바를 너무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는 “제네바는 사도시대 이후 지상에 존재했던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그 정신을 가지고 스코틀랜드에 가서 가서 종교개혁을 위해 헌신합니다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이 물러가면서 “존 낙스의 기도는 10만 대군보다 무섭다”라고 고백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5 그의 생애 마지막
칼빈은 13가지나 되는 병을 앓았기에 걸어다니는 병원이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송장이 걸어다니는 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늘 부지런히 열심히 일했다고 합니다
“주께서 다시 오실 때 내가 게으름 피우는 것을 보시면 어떡합니까?”하고 열심히 사역했다고 합니다 그는 설교하다가 마침내 쓰러졌는데 병석에서도 집필을 계속하여 여호수아 주석을 쓰고 임종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언으로 자기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하라 하여 실제로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년 전 어떤 학자가 아주 겸손한 작은 칼빈의 무덤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칼빈의 종교개혁은 종교뿐 아니라 사회, 정치, 교육, 문화 등 국가 전체를 바꾸는 거룩한 개혁이었다”라는 어떤 이의 평가는 결코 지나친 평가가 아닐 것입니다
6 나가는 말
유럽에서 가장 악취나고 범죄가 들끓던 구제 불능의 도시를 말씀과 설교로 그 사회를 개혁하고 변화시켜 나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고 질서있고 깨끗하고 잘사는 도시로 나라로 만들어 나갔던 칼빈의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절대주권 신학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주권과 말씀을 세상의 모든 영역에 적용해서 변화시켜 나간 위대한 승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신학적인 이론과 사상으로도 탁월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칼빈의 성실한 실천력과 지도력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당시 문제 투성이었던 남성들을 변화시킨 점, 교육을 개혁하고, 구원받은 성도들의 신실함과 성실을 통해서 주님안에서 모두가 다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려 했던 그의 정신에서 많은 점을 배워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랑스의 상류층 학자로 편안하게 살수 있었던 칼빈이 자신의 부귀와 안일함에 빠져있고 또 교황제의 미신적인 제도에 빠져있을 때 그곳으로부터 빠져나오기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했다는 것은 위대한 결단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 한사람의 결단과 순종이 세계사의 물줄기를 돌려놓는 중요한 결단이 아닐 수 없기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마치 바울의 결단과 순종이 세계역사를 바꿔 놓은 것과 견줄수 있는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루터처럼 쯔빙글리처럼 그리고 칼빈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나를 개혁하고 교회를 개혁하고 세상을 개혁하려는 하나님의 귀한 사람들이 많이 나올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