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
종교개혁자 시리즈-쯔빙글리 2017년 11월 15일
쯔빙글리와 스위스 종교개혁
1 출생과 성장 그리고 개혁자가 된 배경
종교개혁의 주된 지도자는 독일의 루터(1483-1546) 그리고 스위스의 쯔빙글리(1484-1531), 그리고 이후에 비록 프랑스 출신이나 스위스에서 주로 활동한 칼빈(1509-1564) 이렇게 세 사람을 들수 있습니다
울리히 쯔빙글리는 루터보다 한해 뒤인 1484년 1월 1일 스위스에서 태어납니다 그는 어렸을적부터 훌륭한 스승들로부터 많은 다양한 분야를 공부를 하였는데 뛰어난 총명함까지 가져서 어릴때부터 헬라어로 성경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는 1506년 스위스 바젤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신부가 되어 1516년까지 글라루스에서 일하였습니다 이 기간동안 그는 늘상 부딪히는 교회의 부조리로 인해 성경연구에 매진하게 되었는데 이를 통해서 그는 개혁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1516년부터 2년간 쯔빙글리는 아인지델른에서 일하였는데 그곳은 유명한 순례지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신약성경 연구를 통해 순례나 각종 선행들이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발견하게 되고 이러한 내용을 담대하게 설교하였다고 합니다
2 쮜리히에서의 지도력과 개혁
1518년 쮜리히의 그로스뮌스터 교회에서 사역할 때는 이미 루터와 거의 같은 결론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당시 캐톨릭의 미신적인 신앙과 행위들에 대해서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는 성경말씀만이 유일한 권위임을 확신하고 마태복음부터 강해설교를 시작해서 신약 전체를 설교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쮜리히에서 감동적인 설교, 경건한 생활, 그리고 뛰어난 학문을 통해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쮜리히 시의회의 의원으로서도 활동하기도 하였는데 그는 면죄부 판매원이 도착했을 때 시 정부를 움직여서 여장을 풀기도 전에 떠나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또한 교황이 십자군 전쟁을 위해 용병을 요청하였을 때도 그는 앞장서서 거부하였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스위스 여러 주 가운데서 쮜리히만 용병을 파견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쯔빙글리의 적수들은 그의 가르침이 독일의 이단자 루터와 같다는 소문을 내기 시작하였고 이때는 루터가 보름스 국회에서 황제와 교황 그리고 온 유럽의 카톨릭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을때였습니다 쯔빙글리는 적들의 소문이 사실임을 선언하였습니다 다만 그것은 루터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성경연구를 통하여 얻은 결론임을 분명히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름스 국회이후에 그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원하기 시작하였고 쮜리히 시의회도 그를 따랐다고 합니다
3 그의 사상과 종교개혁의 특징
쯔빙글리의 목표는 성경적인 신앙과 생활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에 하라고 하지 않는 모든 관습은 금했습니다 이점이 루터와는 달리 좀 과격해 보이는 것이엇습니다 루터는 카톨릭의 관습이라도 성경에서 금하지 않는 것은 그대로 두라고 선언하였지만 쯔빙글리는 관습이나 전통까지도 성경에서 하라고 한 것만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루터교의 예배의식이나 제단의 모습 그리고 목사들의 가운 등은 개신교보다는 카톨릭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쯔빙글리의 가르침에 따라 쮜리히의 수많은 교회들의 성상 조각들이 파괴되고 교회의 파이프 오르간도 치워졌다고 합니다 또 많은 신부, 수녀, 수도사들이 결혼을 하였고 카톨릭 교회에서 하던 식의 성만찬. 즉 빵만 주던 것이 이제는 포도주와 함께 평신도들에게도 주어졌습니다
특별히 루터와 쯔빙글리는 성만찬에 대한 가르침에서 결정적 차이를 보였습니다
사제가 축사를 하고나면 성만찬이 그리스도의 실제 피와 살로 변한다고 가르친 카톨릭은 소위 화체설(化體說) 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흘리는 실수를 하지 않도록 사제만이 포도주를 마셨고 신도들에게는 떡만 주어졌고 남은 떡은 신부가 다 먹어야 했습니다 만약 그 떡을 쥐가 먹었다면 구원을 받을까 못받을까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토론이었다고 합니다
루터는 카톨릭의 주장을 반대했지만 성만찬의 자리에 그리스도가 육체적으로 같이 와서 임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공재설(共在說)입니다
하지만 쯔빙글리는 반대하였습니다 그가 보기에 성찬의 떡과 포도주 그리고 행위들은 단지 영적인 실재에 대한 상징일 뿐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잡히시던 날 밤에 성찬을 나누면서 이것을 기념하라 하지 않으셨던가 하면서 그러므로 성찬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것이다 이것의 바로 기념설(記念說)입니다
1525년부터 두 종교개혁자들 사이의 성만찬 논쟁은 시작되었는데 서로의 연합의 가능성을 타진하다가 1529년 당시 종교개혁의 중요한 지도자들이 독일 말부르그에서 모였습니다 루터와 멜랑히톤, 부쳐, 외콜람파디우스, 쯔빙글리 등이 참석했는데 대부분의 문제에 대해서는 합의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만찬에 와서는 양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종교개혁은 하나가 되지 못한 채 진행되고 말았습니다
쯔빙글리의 사상의 핵심은 성경의 권위가 교회의 권위보다 위에 있다는 것으로, 성만찬은 구원의 수단이 되는 희생의 제사가 아니라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며 그래서 인간의 선행이나 성인숭배, 절대적 중재자로서의 성직자 개념과 성직자의 독신제도와 카톨릭의 연옥신학을 거부하였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예배 개혁에도 관심을 많이 가졌는데 쯔빙글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초대교회의 예배는 말씀 중심의 단순한 형식이었습니다 4세기 초 핍박의 시대가 종료되면서 세속적 요소가 많이 가미된 예배가 시작된 것입니다 핍박의 시대에는 예배 드리다가 끌려갈 수 있고 예배드리다가 순교할 수 있는 시대였습니다 또한 카타콤에서 몰래 예배 드릴때는 목숨걸고 성만찬하고 목숨걸고 성경읽고 기도하는 단순하지만 주님께 온전히 몰입하고 생명을 걸고 예배하는 그런 예배였습니다
그런데 지상으로 교회가 올라오면서 황제와 귀족들과 많은 교인들이 예배에 나오면서 로마신전을 리모델링해서 예배를 드렸고 어떤 왕은 자기가 솔로몬보다 더 화려한 예배당을 짓겠다고 해서 화려한 신전형태의 예배당이 건축되기 시작했으며 문맹자가 많았기에 교회당에 그림이나 상징물들을 많이 배치하기 시작했고 음악도 화려해지고 설교는 천상의 음악처럼 들리도록 라틴어로 하게되고 또 성호긋기 분향 등 인위적인 요소가 추가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쯔빙글리는 이런 잘못된 것들을 바로 잡으려고 했고 초대교회의 단순한 예배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4 그의 죽음
쯔빙글리는 교회와 국가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522년 쮜리히 시 의회로 하여금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종교적 관습 금지 법안을 통과시킵니다 의무적으로 (유아)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어야 하고 세례안받고 교회 안다니면 학교도 직장도 못가게 됩니다 이러한 쯔빙글리의 엄격한 개혁에서 이어진 것이 칼빈의 제네바 종교개혁입니다
그는 스위스가 오직 개신교 국가가 되기 원했던 민족주의자였습니다 그의 종교개혁은 쮜리히에서 다른 주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어떤 주들은 카톨릭의 입장을 고수하였습니다
그는 다른 개신교 주들과 연합해서 카톨릭을 따르는 주들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는 작전을 씁니다 이에 화가난 5개 카톨릭 주들의 연합군 8천명이 1531년 쮜리히를 기습 공격합니다 이때 1500명의 군대와 함께 군목으로 출전한 쯔빙글리는 군목이었지만 칼을 들고 싸웠고 결국 온몸이 칼에 찔려 47세의 나이에 죽고 말았습니다
이 전쟁후 카톨릭을 따르던 주는 그냥 그대로 하기로 합의를 했고 자기의 신앙을 따라 주민들을 옮겨 가게 되고 그리하여 지역별 신앙 색체는 더욱 확실해 졌고 이로서 스위스는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지고도 공존하는 나라가 되었다고 합니다
쯔빙글리의 생애는 다른 개혁자들에 비해 짧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철저한 개혁의 정신은 이후에 청교도들에게로 이어졌습니다 이 청교도들은 훗날 미국 건국의 기초를 제공했고 이 청교도 정신을 가진 선교사들이 한국으로 와서 한국 교회의 초석을 쌓게 됩니다
그의 사상과 개혁은 성경에 대한 단순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가 성경을 연구하면서 즐겨하던 말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그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에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율법속에서만 기쁨을 얻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인간의 내면 깊은 곳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5 나가는 말
감동적인 설교자였고 경건한 생활, 깊은 신학적 소양을 갖추었던 쯔빙글리는 오직 성경의 권위가 최고의 권위이며 그것은 교회의 권위보다 위에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씀 하는대로 순종하고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성경에 따르면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 확실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위해서 믿음과 함께 인간의 선행을 강조하는 카톨릭 신학을 거부하였고 또한 성인숭배, 절대적 중재자로서의 성직자 개념과 성직자의 독신제도와 카톨릭의 연옥신학을 용감하게 거부하였습니다 루터가 저항정신으로 카톨릭과 싸워나갔다면 쯔빙글리는 조금 더 나아가 거부할 것들은 단호히 거부하면서 나아갔습니다
이 두 뛰어난 개혁자가 잘 연합하고 합력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남지만 아무튼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은 이어지는 스위스 제네바에서의 칼빈의 종교개혁에 크나 큰 영향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