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자 시리즈 (6)- 영국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
1 출생과 성장
존 웨슬리(1703-1791)는 1703년 4대째 영국 성공회 목사 가문에서 태어납니다 그의 어머니 역시 훌륭한 신앙인으로 자녀들을 잘 가르친 분으로 알려져 있는데 존 웨슬리는 총 19명의 자녀중 15번째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의 경건한 신앙의 영향을 받은 그는 동생 찰스 웨슬리(1707-1780)와 함께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갑니다
그는 그곳에서 초대 교회 교부들의 경건한 삶을 다룬 글들을 읽고 많은 감동을 받았으며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이후에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데 모든 힘을 쏟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1728년 존이 아버지 목회를 돕기 위해 학교를 쉬고 고향으로 가 있는 동안 동생 챨스가 대학안에서 Holy Club을 결성하여 절제된 거룩한 삶을 추구합니다 성경공부, 기도, 금식, 정기적인 선행 실천을 약속하고 정기적으로 감옥을 들려 죄수들을 위해 기도해 줍니다
존이 돌아와 그 모임의 리더가 되었고 열심히 활동합니다 그러나 존은 거룩한 삶을 살려고 노력은 하나 내적인 평안이 없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런 경험을 했지만 서로 밖으로 드러내 이야기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2. 미국으로 건너감. 그러나 실패하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옴
그런 상황에서 당시 신대륙 미국 조지아주로부터 목회자로 청빙을 받은 두 형제는 1735년 미국으로 가기로 합니다 미국으로 향하던 중 배가 풍랑을 만나 죽음의 공포를 느낍니다 이때 배 한쪽에서 평화롭게 찬양과 기도를 드리고 있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모습을 보고 큰 충격에 빠집니다 자신은 목사이지만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데 저들은 도대체 어떤 믿음이기에 저렇게 평안하게 찬송하는가 하고 자기의 신앙을 돌아보게 됩니다 훗날 그는 그때 일을 회고하기를 “그들이 찬양하는 모습은 내가 본 가장 영광스러운 광경이었다”라고 했습니다
3년 여 계속되었던 미국에서의 선교와 목회는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패배감과 좌절감을 가득 않고 그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옵니다 나약함 속에 빠져 있던 그는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런던에 설립된 모라비안 선교단체와 접촉하였고 특히 모라비안 설교자 피터 보엘러를 만납니다 그와 대화하면서 웨슬리는 그가 영적으로 매우 깊은 사람임을 알고 그 이후로 그에게서 영적 자문을 구하게 됩니다 보엘러는 웨슬리에게 ‘중생’과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만이 죄를 이길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는 또 루터가 말한 이신칭의 즉 하나님의 용서의 체험은 개인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임을 강조하면서 웨슬리도 할 수 있다고 격려해 주었다고 합니다
3. 그의 삶을 바꾼 회심사건
그래서 웨슬리 형제들은 모라비안 교도들의 기도회에 많이 참석하고 루터의 책들을 많이 읽게 됩니다 그러던 중 형제들의 삶을 바꾸어 놓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1738년 5월입니다 먼저 동생 챨스가 21일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을 읽다가 마음이 뜨거워지고 그리고 3일후 24일 저녁에 존이 올드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모임에 갔다가 누군가가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고 있는데 불연 듯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체험합니다
“거기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고 있었다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심령의 변화를 설명할 때 나의 마음이 뜨거워져 옴을 느꼈다 나의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가 나의 죄를 모두 없애 주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해 주셨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존 웨슬리는 그토록 갈망했던 영적 평안과 확신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웨슬리는 모라비안 교도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신앙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개인의 뜨거운 신앙체험, 찬양과 기도의 예배, 소그룹 사역의 중요성, 선교의 열정 등을 배우고 흡수합니다
4. 회심이후의 사역
존과 챨스는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설교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당시 영국의 영적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루터와 칼빈이 죽은지, 그리고 영국의 종교개혁이 일어난지 거의 2백년이 흘러서 영국의 청교도 정신은 사라졌고 국교회의 감독들은 세속적이 되어 신앙의 형식만 남은 상황이었습니다 청교도 신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영혼 구원은 잊혀진 이야기가 되고 신자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술에 빠져 있었고 성경이나 교회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간혹 신앙에 열심인 사람들도 하나님에 대해서 막연하게 생각했고 그저 선하고 착하게 살면 된다는 식의 신앙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빈부격차는 심해지고 가난한 아이들이 하루에 14시간씩 일을 해도 끼니를 잇지 못하며 런던의 4분의 1이 술집이며 밤에는 불량배들이 들끓던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형제의 이신칭의의 강조와 성령의 역사로 회심의 체험과 성령의 계속되는 활동으로 변화되어 가는 성화를 강조하는 설교는 파격적이었고 이에 따라 교회들은 이들 형제들에게 강단을 내어주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던 중 그들은 옥스퍼드의 Holy Club의 멤버였던 죠지 휫필드에게서 도전을 받아 야외에서 설교하기 시작합니다
1739년 4월 2일 브리스톨에서 처음으로 3천명의 사람들앞에서 야외설교를 한 존 웨슬리는 사람들의 폭발적인 반응에 큰 용기를 얻어 영국 전역을 돌며 복음을 전하며 부흥운동을 일으키는데 그는 이렇게 평생을 야외설교를 하게 됩니다
전통과 관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18세기 영국에서 모든 예배들이 허가증을 받아야 하며 설교는 주일날 반드시 교회안에서 해야만 한다는 관습을 깨고 야외예배를 드립니다
웨슬리의 설교는 특히 도시 노동자들과 가난한 자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면서 18세기의 영국에 사도 바울이 다시 살아왔다고 할만큼 사람들에게 도전과 영향을 줍니다
원래 영국의 국교회는 교구제도로 목사는 자기 교구를 벗어나면 안되었습니다 아무도 웨슬리에게 강단을 내어 주지 않자 그는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라고 외치며 어디든지 복음을 듣기 원하는 자들에게로 찾아 갔습니다 이렇게 54년동안 46만 킬로미터를 주로 말을 타고 다니며 설교했고 약 4만번 이상의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5. 존 웨슬리의 신학적 특징
존 웨슬리의 사상은 성결신학과 오순절 순복음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줍니다
우선 그는 그의 경험에 근거하여 복음적 신앙체험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강조합니다
회심의 경험, 성령 체험이 내적인 평안과 확신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구원론에 있어서 우리는 종교개혁이 로마 카톨릭의 믿음에 선행이 더해져야 한데 대해 저항해 루터가 이신칭의를 주장한 것을 잘 압니다 여기서 칼빈은 모든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속한다는 것과 예정론을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시간이 가면서 오해가 되어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실 것인데 전도(선교)하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들이 퍼지면서 18세기에는 행위가 구원에 전혀 상관이 없기에 방탕한 생활을 해도 상관없다는 영적으로 안일해지는 성도들이 많아집니다 웨슬리는 이런 사람들의 태도와 나아가 칼빈의 예정론에 반발을 하게 되는데 오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인간도 자유의지를 가지고 거룩한 삶과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또한 칼빈이 인간은 구원받은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성화의 과정을 거치나 죽음 후에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비로소 완전한 성화(영화) 가 이루어진다고 보았는데 웨슬리는 우리가 구원받고 살아 있는 동안 어느 시점에 이르면 완전한 거룩, 성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살전 5:23의 전반부의 말씀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를 그렇게 해석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칼빈이 말한 거룩은 완전히 죄가 없어지는 상태를 말하고 웨슬리가 말한 거룩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죄에 대해서 승리하는 것을 말합니다 거룩에 대한 이해의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웨슬리는 당시의 영국의 세속주의에 저항하면서 성도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죄를 이기고 세상 속에 나아가 ‘거룩’을 흘려 보내는 삶을 살면서 세상을 깨끗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금주운동, 노예제도 반대 운동, 미성년자 노동금지 운동, 교육기관 설립 등의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는 기독교의 모습을 만들어 갑니다
6. 제자 양성
일생 순회 전도자로 살면서 그는 목사만으로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없어 평신도 중에서도 성경이해와 말씀에 은사가 있는 이들로 평신도 설교자를 세웠고 여성들을 소그룹의 지도자로 세우기도 합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주일학교를 통해 아이들에게도 체계적인 성경공부를 시킵니다 이에 그가 죽을 무렵 12만명의 성도와 1500명의 감리교 설교자가 생겨났습니다 또한 존 뉴튼, 윌리엄 윌버포스 등이 그의 제자였고 미국의 감리교 지도자로 활약한 프란시스 에스베리가 유명합니다
그는 26세의 나이로 1771년 미국으로 건너가 스승인 웨슬리처럼 말을 타고 주로 미국 서부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평생 48만 킬로를 여행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감리교 목사 4명, 평신도 300명이던 것이 에스베리가 45년의 사역을 마치고 세상을 떠날 무렵 2천명의 감리교 목사와 20만명의 평신도들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7 평가와 깨닫는 점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이 이룬 복음의 내용을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네덜란드, 독일,미국 등으로 뜨거운 구령의 열정을 가지고 전한 이가 바로 존 웨슬리입니다 그는 기성교단에서 외면과 거부를 당해도 때로는 핍박을 받아도 굴하지 않고 야외에서 복음을 전했던 용기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의 세속주의에 물든 교회와 성도들과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전과 용기를 주었던 복음의 나팔수였습니다
수시로 비가오고 겨울에는 음습하게 추운 영국 날씨, 길에는 도둑이 들끓던 영국의 곳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한 존 웨슬리의 복음에 대한 열정을 모든 성도는 배워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