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수요예배때 종교개혁자들의 신앙과 삶에 대해서 몇주동안 공부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부족한 내용이지만 도움이 되었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첫번째 시간: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캐톨릭의 면죄부 신학에 대한 95개조의 반박문을 내어 걸므로써 종교개혁의 불길이 전 유럽으로 일어났습니다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으로 그 의미가 더 깊은데요 지난 주일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해서 짧게나마 살펴보았고요 오늘부터 몇주간 수요일을 통해서 종교개혁자들의 삶과 신학에 대해서 함께 공부해 보려고 합니다
1 초대 중세 교회사 큰 그림
종교개혁을 이해하려면 먼저 중세의 암흑시대가 어떻게 온 것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초대교회는 AD 64년 네로의 대박해를 시작으로 대핍박의 시대로 접어듭니다 이때 베드로와 바울사도가 순교합니다 교회는 지하 소위 카타콤으로 스며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AD380년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로 선포됩니다
약 320년만에 교회는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갑자기 많은 교인들을 맞아야 했고 이에 따라 정부로부터 부동산과 기부금을 받고 화려한 교회 건물을 세우기 시작했고 또 왕과 귀족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고 성직자들은 국가 공직자에 준하는 힘과 권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교회 교인이 되고 성직자가 되는 것이 멋지고 화려한 일이 되면서 성직자들은 말씀과 기도보다 고위층과 관계 맺는 일에 더욱 힘쓰게 되고 귀족의 자제들중에는 신앙에 의한 헌신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리가 좋아서 성직자들이 되려는 이들이 많아지게 됩니다 또한 교회는 일반성도들이 알수 없는 라틴어로 된 성경만을 사용해서 대부분이 문맹자이던 시대에 80퍼센트의 백성들은 라틴어를 읽지도 이해하지도 못함
또한 성경자체가 필사되어서 가격이 너무 비싸서 일반 백성들은 가질수 없었습니다 값이 큰 농장하나의 값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왕이나 부유한 귀족만이 성경을 가지게 되었지요 이런 과정에서 캐톨릭 교회는 비성경적인 교리와 사상들을 발전시키지만 일반 성도들로서는 성경을 모르니 교황과 사제들이 그저 하나님의 뜻이니 따르라 하면 그냥 무지함속에서 따라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성인숭배 면죄부 성유물 숭배- 성인들의 유물을 지니고 있으면 축복을 받는 다고 하는 미신적인 사상, 화체설, 연옥사상 등입니다
AD 9세기경 신성로마 제국이 유럽전역을 장악하면서 교황청의 권력은 절대적이 되고 이때부터 교회는 정치에 개입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사이에서의 절대적인 중보자의 위치를 갖기 원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만물과 사람을 다스리는 주권을 교황에게 위임했다”라고 주장하면서 죄많은 세상의 지도자들은 교회의 지도와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죄인을 출교시키는 교회의 권위는 중세기 권력자들을 교회밑에 두는데 효과적인 무기의 역할을 했습니다
2 종교개혁 전 개혁자들
이런 캐톨릭의 영향 아래서의 중세의 암흑기 속에서 무엇보다 자기 나라 언어로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상을 지닌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먼저 영국의 위클리프입니다
가. 위클리프(1320-1384)
영국의 선구적 종교개혁자로 종교개혁의 새벽별이라고 불립니다
당시 교황청은 프랑스 아비뇽과 로마의 두 교황청으로 분열되어 그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있을때였는데 그는 교회를 무형의 유형의 두 종류로 나누었는데 그가 보기에 참된 교회는 교황과 그를 중심으� 한 눈에 보이는 계급제도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택함받은 이들로 이루어진 눈에 안보이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택함받은 자들은 자신들의 신앙생활의 열매를 통해서 그 구원받았음을 짐작할수 있다고 보았고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교황은 자신의 구원조차 확실하게 보장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성직자든 평신도든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고 보았고 중요한 것은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보면서 진정한 리더쉽의 권위는 지금 그 사람이 하나님과 얼마나 깊고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데 또한 얼마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충만한가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교황을 향해서 “진정한 성경적 교황이라면 청빈하고 겸손하게 살면서 교회를 조용히 섬기고 크리스천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교황청은 사람들을 정치적인 술수로 조정하는 하나의 정치적인 힘으로 전락했다 그리스도는 가난하게 사셨는데 교황은 세상의 화려함을 위해 땀흘린다 -더군다나 교황의 사치와 세속적인 삶을 볼 때 -예수님은 진리이신데 교황은 거짓이고 마치 적그리스도처럼 느껴진다”라는 말까지 하게 됩니다
위클리프는 당시 카톨릭 교회가 주장하던 대로 성경은 교회의 소유이며 교회만이 성경을 바르게 해석할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교회는 눈에 보이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눈에 안보이는 택한자들의 교회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카톨릭 교회의 권위는 그에게 인정이 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택함받은 자들은 당시처럼 라틴어로만이 아닌 자신들의 언어로 성경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모든 사람의 성경탐구 권리를 주장합니다
이에 학자들을 모아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는데요 당시 인쇄기가 없어서 위클리프는 제자들을 모아 성경을 암송하게 합니다 어떤 이는 마태 복음, 어떤 이는 요한복음 등 해서 영국전역을 다니면서 자신의 외운 성경을 들려주게 합니다
또한 위클리프는 캐톨릭교회가 가르치는 화체설을 부정하였습니다 화체설은 성찬때 사제의 봉헌시에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주장인데 그가 보기에 이것은 미신적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성육신 하셨을 때 신성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파괴하지 않았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몸이 떡속에 임재하지만 떡의 성질을 파괴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성찬을 통해서 신비적인 형태로 임재하시며 은혜를 주신다고 본것입니다
그는 1384년에 사망합니다 그러나 그는 죽은 이후에 이단으로 정죄되고 그의 무덤이 파헤쳐져서 뼈를 화형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그의 추종자들은 많아 져 갑니다 그들은 계속 늘어나서 나중에는 영국 종교개혁의 밑거름이 됩니다 그러나 그전에 벌써 그의 가르침은 영국에 유학왔던 학생들을 통해 동구의 보헤미아까지 전해졌습니다 그 영향을 받고 신앙의 개혁을 부르짖었던 이가 바로 존 후스였습니다
나. 요한 후스(1372-1415)
요한 후스는 체코의 보헤미아 출신으로 프라하대학의 총장을 지낸 인물인데 옥스퍼드에 유학한 젊은 시절부터 위클리프의 글에 매료가 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위클리프의 “교회는 교황이 아닌 그리스도가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 택함받은 자들의 모임이다”라는 말에 깊히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신학교 교수로서 또 베들레헴 교회의 설교자였던 그는 이런 위클리프의 사상과 신학을 마음껏 설교하고 전파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그는 라틴어와 체코어로 설교를 하여서 체코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고 대부분이 문맹자이던 시절 그는 그림 그리기에 재능이 있어 뚱뚱하고 거만해 보이는 교황과 맨발의 예수님을 비교하는 그림 등을 그려 교회에 걸기 시작하였고 이런 것은 엄청난 파장효과를 낳았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후스는 1410년 로마의 소환명령을 받았지만 그는 거부하였고 결국 이듬해 파문을 당하고 맙니다 당시에는 교회분열의 혼란상이 절정에 달하던 때로 세명의 교황이 난립하던 시기였습니다
보헤미야 국왕 이하 온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던 후스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성경만이 교황을 포함한 모든 신자를 심판할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그는 성경에 순종하지 않는 교회에게는 복종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성경만이 신자들에게는 최고의 권위이다!!” 이것은 물론 위클리프에서 온 사상입니다 이 생각은 지금의 개신교 신자들이 보기에는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의 분위기에서는 가히 혁명적이었습니다 아무튼 위클리프와 후스에 의해 선포된 이 원리는 후에 종교개혁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권위를 성경보다 높이 두는 캐톨릭교회의 권위에 정면대결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교황 요한 23세는 다른 교황과 싸우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면죄부 판매하는 것으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후스는 면죄부가 죄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그렇게 한다고 대항했고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물건처럼 매매한다는 것은 그분께 대한 반역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황의 야망을 위해서 기독교인들간에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너무도 불신앙적인 행동이었습니다 후스는 이일에 대해서 맹렬하게 비난을 했습니다
로마 교황청은 이에 요한 후스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1415년 종교재판 후 화형시킵니다 그가 감옥속에서 남긴 글에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저는 먼저 주님의 곁으로 떠나갑니다 그러나 결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여 진리를 찾으십시요 진리를 들으십시요 진리를 배우십시요 진리를 사랑하십시요 진리를 말하십시요 진리를 지키십시요 그리고 진리를 수호하십시요
진리가 여러분을 죄와 마귀로부터 영혼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살아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러나 그것을 거부하고 큰 소리로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주 예수여 당신만을 위해 이처럼 잔인한 죽음을 불평없이 받아들입니다 부디 나의 원수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불길속에서 그는 시편을 낭송했다고 합니다
보헤미아인들은 이 만행에 대해 분노에 떨었고 그의 가르침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어 후에 마틴루터와 칼빈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또 어떤 이들은 교회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모라비아파로 살아남게 됩니다
나가는 말:
진정한 의미에서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약 100여 년 전에 종교개혁의 길을 예비하기라도 하듯이 로마 카톨릭과 싸웠던 두 사람 위클리프와 후스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러 온 세례 요한처럼 당시의 위정자들이나 권력자들 앞에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용기있게 진리를 말하던 세례 요한의 모습이 위클리프와 후스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듯 합니다
종교적 위선자들이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외치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마3:7-8)라고 선포했던 세례 요한의 절개와 용기
결국 분봉왕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하려고 할 때 요한은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고 (마14:4) 또한 용기 있게 외쳤습니다
그리고 결국 세례 요한은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요한 후스처럼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다 성난 무리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습니다 죽으면서도 부르짖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행7:59-60) 후스도 화형을 당하면서 원수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천년을 다스리던 로마 캐톨릭에 저항하는 일은 그렇게 갑자기 순간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백여년 전부터 준비되고 시작되어서 마침내 무르익어 이루어진 일임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는 많은 사람의 희생과 헌신과 순교의 피가 있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한국 교회를 위해서도 토마스 선교사님의 순교의 피로부터 시작해서 많은 믿음의 선배들의 희생과 헌신과 순교가 있었음을 새삼 느끼며 깊은 감사를 올리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은 이렇게 자유롭게 읽고 있는 성경도 그 옛날에는 번역도 되지 않았을 때가 있었구나 그래서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할때가 있었구나 생각해 보니 우리가 마음껏 성경을 보고 읽고 묵상하고 또 연구하고 설교하고 듣고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그저 우연히 된 것은 없습니다 모든 만물뒤에 하나님의 섭리와 수고가 있고요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들 특히 자유와 진리를 위해서 수고하고 헌신한 선배들이 있음에 다시한번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